제러미 벤담
1748~1832
철학자의 삶
제러미 벤담은 1748년 영국 런던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법조계에 입문하지 않고 철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당시의 법률을 모두 비판하면서, 법학의 주요 영역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동성애 금지법이나 구빈법 같은 법 제도의 개혁을 제안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프랑스 대혁명 초기에 혁명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명예 프랑스 시민이 되기도 했다. 그는 신세대 추종자들을 위한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철학자의 사상
그는 평생을 이치에 맞는 성문법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법과 정부의 완전한 체계의 이론적 토대를 탐구했다. 그는 법과 정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였고, '공리의 원칙' 혹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공리주의 원칙은 고통과 쾌락이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다는 것을 자연적 사실로 단정하고, 법과 이성의 힘으로써 최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구조의 성립을 정책과 입법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한다. 정부가 존재하는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며,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는 법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체계적인 성문법전 "파노미온"이라고 불렀다.
공리주의는 즉,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도구로 사용하여 인간을 감시, 교육함으로써 질서를 만들고 '유령처럼 군림'하는 감독을 실시한다. 이렇게 감시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았던 그는 공리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파놉티콘'을 남겼다. 이것은 일종의 감옥 양식이다. 근대의 많은 시설이 이 모형을 하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
1806~1873
철학자의 삶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교육은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의 주도면밀한 교육에 의해서 주로 이뤄졌다. 그의 아버지는 제러미 밴담의 열렬한 추종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어려서부터 공리주의 사상을 주입하며 그를 엄격하게 교육했다. 그의 아버지는 본인과 밴담이 사망 후에 공리주의의 실천과 전파를 이어 나갈 후계자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논리학, 정치경제학, 화학, 동물학, 수학 등을 배우며 집중적인 학습을 하였다. 하지만 공부에만 매달리며 집중한 그의 학습 방법은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신경쇠약으로 고생하였고, 우울증을 겪게 된다. 그는 시에서 정서적 안정과 위안을 찾으며 회복하게 된다. 그는 '공리주의자 협회'라는 독서 토론회를 친구들과 조직하였다. 그는 종교에서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였는데, 그 당시에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급적 종교에 관한 언급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피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무지하고 편협한 사람들이 기독교의 부활을 자랑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지독한 편견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자의 사상
그는 인간이 목적으로 추구할 만한 유일한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쾌락이라는 공리주의의 명제를 수용하며, 공리주의자를 자처했다. 그는 자유, 지적 호기심, 자존심, 독립성 등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며, 인간적인 품위를 지켜 줄 수 있는 쾌락인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을 최대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리주의를 자유와 개별성이라는 관념과 결부시켜 '자유론'을 저술하였고, 이는 그를 근대 자유주의의 아이콘으로 부상시켰다. '자유론'은 자유주의 정치이론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다. 단, 의견을 내세울 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며, 저술이나 대중연설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원칙'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영향을 끼쳐 표현의 자유는 시민의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기본적인 정치원리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생각한 좋은 정부는 모든 인민이 참여하는 정부였다. 여기서 모든 인민에는 여성도 포함된다. 그는 여성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지지하였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 참정권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의 노력은 실패하였지만, 여성의 해방에 대한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정당한 권리와 평등한 보호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결합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도 시대적인 한계와 선입견을 볼 수 있다. 그는 종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할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여성은 주로 가사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가 꽃을 피우던 시기에 사회주의의 여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경제적 자유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분배가 성장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며 노동계급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상속으로 인한 소득은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야 하며, 상속 자체가 기회균등의 원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말을 구분하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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